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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2드라마 고려거란전쟁
    KBS2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거란의 탄생

    KBS의 34번째 대하드라마로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드라마 <고려거란전쟁>는 제목처럼 고려거란전쟁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입니다. 거란의 침략은 3차까지 있었으며 드라마의 주내용은 2차, 3차 전쟁의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우리와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을 해왔던 거란의 탄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란족은 4세기 중엽에 처음 등장했고 몽골족 계통의 여러 부족 중 하나였습니다. 10세기 초 동아시아는 대혼란의 시기로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자 중국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는 오대십국시대가 되었으며 이후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50년 넘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때 혼란의 시기를 틈타  거란족의 힘이 막강해졌습니다. 이들은 척박한 땅에 살면서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계절마다 목초지를 찾아다니며 유목생활을 해왔고 더불어 말 다루는 것에 익숙하였기에 별도의 훈련 없이 바로 최강의 기병 역할도 가능했습니다. 916년, 거란 최초의 황제 야율아보기가 8개의 부족을 통일해 거란 대제국을 세웁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키가 2 미터가 훌쩍 넘었고 300 근짜리 활을 당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합니다. 거란족을 통합한 야율아보기는 급속도로 영토를 넓혀서 거란이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나라의 기틀을 세운 거란은 고구려를 계승하여 대조영이 세운 발해(698~926)를 공격해 멸망시킵니다. 발해 유민들은 압록강 유역에 정안국을 세워 저항을 이어갔지만 거란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936년 후진의 석경당이 황제에 오르기 위해서 중국 북부의 연운 16조를 거란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수락한 거란은 석경당이 황제 오르도록 도와줍니다. 시간이 흘러 후진의 배신으로 거란은 후진을 멸망시키고 동아시아 최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고려는 같은 민족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942년 이들이 보내온 낙타 50 필을 만부교라는 다리에 매어 두고 방치해 굶겨 죽이기도 하고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이 유언으로 남긴 훈요 10조에는 짐승과도 같은 거란을 본받지 말라는 내용이 있을 만큼 거란을 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1차 고려거란전쟁

    송나라와의 전쟁을 앞둔 거란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고려를 자신들과 교류하게 하고자 사신을 보냈으나 거란을 적대적으로 생각해 왔던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고 분노한 거란은 993년 거란의 명장 소손녕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고려 거란 전쟁이었습니다. 소손녕이 봉산군을 점령한 뒤 항복하라는 서신을 보내자 고민하던 고려 6대 왕 성종에게 3대가 정승을 지낸 명문 가문 출신의 엘리트인 서희가 나서서 자신이 사신으로 가겠다고 나섭니다. 서희가 거란 진영에 도착하자 소손녕은 자신이 대국에서 온 귀인이니 서희가 큰절을 해야 한다면서 기싸움을 시작했지만 서희는 이를 끝까지 거부하였고 결국 소손녕이 한 발 물러나 서로 맞절을 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사실 서희가 사신으로 왔을 당시 거란군을 상대로 승리했던 고려군의 기세에 소손녕은 고려와 전면전을 펼칠 생각이 없었으며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교류가 있었던 송나라와 고려가 손을 잡고 거란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었고 소손녕은 옛 신라의 땅에서 시작된 고려는 옛 고구려 땅을 원래 주인인 거란에게 내주고 섬기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대해 서희는 우리 고려는 옛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이고 그래서 국호 또한 고려인 것이며 서경(평양)을 도읍에 둔 이유도 그러하다고 반박합니다. 또한 고려가 거란과 교류하지 않은 것은 양국 사이에서 도적질을 하는 여진 때문이니 여진을 쫓아내 우리의 옛 땅 강동 6주를 돌려준다며 거란에게 조공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결국 소손녕은 서희의 제안을 수락하였고 우리는 북쪽의 여진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서희의 담판'으로 거란군을 돌려보내고 새로운 영토인 강동 6주까지 얻을 수 있게 했던 그를 우리는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으로 칭하는 이유였습니다.  

    앞으로의 행보

    2차 고려거란전쟁이 일어났던 배경은 고려 7대 왕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내연남 김치양과 손을 잡고 목종의 왕위를 빼앗으려 하자 강조 장군이 정변을 일으켜 현종(대량원군)을 왕으로 추대했던 사건입니다. 이때 거란은 고려가 조공책봉 관계를 지키지도 않으며 군사를 이용해 왕을 바꾼 것을 명분으로 삼아 2차 고려거란전쟁이 시작됩니다. 1010년, 거란 황제 야율융서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흥화진을 공격하였고 그때 흥화진의 우리 병력은 고작 3,000명뿐이었지만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의 활약으로 거란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흥화진 점령에 실패한 야율융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통주를 공격하였고 통주에서는 우리 고려군 최고 사령관 강조와 고려의 비밀 무기인 검차로 맞서지만 아쉽게도 패배하고 맙니다. 여기에서 등장했던 검차는 극 중 1화에서 가장 강조된 병기로 별도의 티저 영상이 있을 만큼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거란은 곽주를 점령하고 개경 궁궐까지 방화해 버리지만 야율융서는 날씨와 약탈 시기, 유목 준비 등으로 회군을 고민하던 중 고려의 한 신하가 군사를 되돌리면 고려 왕 현종에게 직접 찾아가 친조를 청하겠다며 회군의 명분을 줍니다. 이에 개경을 점령한 지 10일 만에 거란군은 퇴각하지만 이때 흥화진의 양규 장군과 귀주의 김숙흥장군이 힘을 모아 1,700명의 병력으로 약 7번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회군하는 거란군을 사살하고 3만여 명의 고려 포로를 구출해 냅니다. 그러나 양규와 김숙홍장군은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맞고 안타깝게도 함께 전사하고 맙니다. 약속한 것과는 달리 고려 8대 왕 현종이 친조 하지 않자 야율융서는 강동 6주를 내놓으라고 하지만 이 또한 거부하여 거란의 3차 침략이 다시 한번 시작됩니다. 1018년, 거란의 명장 소배압(소손녕의 친형)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략할 때 당시 70대인 문관이자 서북면 최고 군사령관인 강감찬이 흥화진에 쳐들어오는 이들을 댐처럼 강물을 가두었다 터트려 격파합니다. 하지만 흥화진으로 쳐들어온 이들은 미끼였고 거란군의 본진은 개경으로 향합니다. 소배압은 고려의 주력부대를 피해 내륙길로 내려오게 되고 현종은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 물자와 식량들을 없애 적군이 보급의 한계를 느껴 지치게 하는 전술을 펼칩니다. 현종의 항쟁과 강감찬 장군에게 포위될 위험에 처하자 소배압은 회군을 시도하지만 이에 강감찬 장군은 모든 병력을 귀주로 집결시켜 회군하는 소배압과 병사들을 귀주 벌판에서 검차와 기병, 보병 조합으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귀주대첩입니다. 26년간 이어진 고려거란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끝맺었으며 야율융서는 "다시는 고려 땅을 쳐다도 보지 말라."라고 할 정도로 고려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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